Fragmentary thought548 게이샤 1. 게이샤를 마셨다. 요몇년간 가장 핫하고 비싸다는 원두.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 취향과는 엄청 멀었다. 이렇게 기록을 해두는 건 시간이 지난 뒤에 내 평가가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지표를 남겨두기 위해서다. 산미가 두드러졌고 다양한 풍미가 섞여 있다는건 느낄 수 있었지만 그것들이 내게는 그리 의미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단 하나의 맛이라도, 단 하나의 향이라도 내게 맞는 것이 중요하지 맞지 않는 것이 수없이 펼쳐진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커피 초보에 불과한 내가 아직 감당하지 못할 만한 깊이의 커피를 만나 그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테다. 2. 사람들이 커피나 위스키, 와인 등에 빠져드는 이유는 그것들의 맛과 향이 가지는 모호함에 있다. 정답이 정해진 직설적인 맛이 아.. 2023. 3. 26. 꼰대 꼰대는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기준만 내세우는 사람은 노소에 상관없이 꼰대다. 회식을 무조건 강요하는 것도 문제, 회식은 무조건 불필요하다는 것도 문제. 누구든 상황에 맞게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꼰대인거다. 요즘 젊은 애들이 자기랑 맞지 않는 가치들은 모두 고루한 것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자신들이 싫어하는 이들의 행동과 어떤 부분에서 다른지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지? 변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고 과거의 가치를 지키는 것은 무엇이든 나쁘다는 황당한 가치관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모르겠다. 교장선생님께서 교사 연수 때 '당신도 누군가의 개새끼다.' 라는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관계에 신경쓰며 조심해서 살아가야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시더라. 이걸 인지하지 않으면 진짜 개새끼가 된다.. 2023. 3. 25. 윤경희, 분더카머 버려진 것들에서 고통과 더불어 매혹을 느낀다. 시선, 손길,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 그리고 침묵하는 것들에 신경이 쓰인다. 쓸모없고 때 묻고 낡은 것들에 취향이 있다. 빛바래고 망가져 방치된 사물이 지극히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자 풍부한 역사를 간직한 문명의 증거로 보이는 때가 있다. 의미가 희박한 일상의 말들이 시만큼 낯설고 신비하게 들리는 순간이 있다. 어떤 독자도 밑줄 치지 않았을 문장들과 동그라미 치지 않았을 단어들이 그것이 담긴 책 한 권의 무게를 온전히 지탱하는 굽처럼 읽히기도 한다. 내가 그것들에서 감지한 리듬과 그것들이 내게 드러내는 그늘을 신뢰하며, 그것들에 관해 타인들이 먼저 발화한 소량의 말을 참조하면서, 왜 아름다운지 왜 떨리는지 아직은 알 수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까닭을 밝혀내는 .. 2023. 3. 21. 망각의 힘, 이지러지는 기억의 원형들 흘러가는 시간으로부터 힘을 얻는 망각은 사건의 원형을 이지러지게 하며 이윽고 새로운 형태로 조합하여 자리잡게 만든다. 그보다 훨씬 거대한 망각의 찌꺼기에 불과한 기억은 때때로 (혹은 상시) 무기력할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일은 발생했을 당시에 해결하고 그 모든 결과를 가장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수단으로 남겨야한다. 이것이 어떤 일이 발생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왜곡으로부터 사건의 원형을 유지하기 위해 당사자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해방 이후의 우리 역사는 시작부터 실패했고 이제는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조차 모호하게 되어버렸다. 잊히길 바랬던 일의 주체들은 망각으로 부터 힘을 얻었고 기억하길 바랬던 지사들은 망각으로 인해 정당성을 상실했다. 2023. 3. 17. 드라마 마지막회 같은 노래 11시 클래식, 고통은 지나가고 아름다움은 남는다 EBS 라디오 클래식 프로그램 진행자인 바리톤 정경이 만든 노래가 있다. 11시 클래식, 그가 진행하는 프로그램과 같은 제목이다. 아침에 EBS 영어 방송을 듣다보면 중간 광고에 노래의 일부가 나오는데 그 부분이 너무 좋아 애써 찾아 듣게 됐다. 노래 가사 전체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바치는 세레나데 같지만 정경이라는 사람의 삶이 그리 평탄치 않았기에 그것을 이겨내고 지금에 이른 자신의 지난 날을 회고 하는 듯한 중의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인상적이다. 고통은 지나가고 아름다움은 남는다. 노래의 핵심 가사인 이 부분은 르누아르가 남긴 말이라고 한다. 질곡이 많았던 인생이었지만 삶을 긍정하고 아름다움을 남기려했던 그의 마음이 읽힌다. 때로는 잔물결이 때로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를 넘어 평온의 항구에 도달한 항.. 2023. 3. 13. 죽어봐야 지옥을 아는 법 세상의 그 모든 악과 불의, 비극과 고통, 사고와 환난이 자신만은 피해 갈 거라고 굳게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앞장서서 악을 행하며, 불의를 합리화시키고, 남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며 사고와 환난으로 피해받은 사람들을 조롱한다. 자기 머리 위에 탄식의 칼날이 드리워져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때를 만난 듯이 활개치는 당신들이여, 자신과는 상관없다 생각하는 멸망의 순간은 우리 모두에게 평등하게 다가올 것이니 그렇게 의기양양하기 고개를 쳐들 필요는 없다. 2023. 3. 11. 계묘국치 - 시일야방성대곡 지난번 이등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 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 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 상하가 환영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 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이등 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 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2023. 3. 6. 사물의 이력 - A7R2 2015년 9월 1일부터 2017년 12월 15일까지 837일동안 사용했던 A7R2. 그 이후에 다원 배원장님께 넘기고 A7R3으로 넘어갔고 A7R4를 거쳐 지금은 A1을 사용하는 중. 이 바디는 여전히 배원장님께서 애용하고 계시다. 사진을 참 많이 찍는 나, 그리고 나 보다 더 찍을실지도 모르는 배원장님의 손에서 8년째 구르고 있으면서 잔고장 한번 없었던 이 A7R2는 정말 대단한 바디인듯 하다. 오른쪽 아래에 붙어있는 원펀맨 스티커는 내가 사용할 때 원펀맨 같이 끝내주는 한방이 있는 사진을 찍게 해달라는 염원을 담아 붙였었는데 배원장님이 그대로 유지하고 계셨다(그래서 계속 놀라운 사진이 찍어내셨던 것이었....). 사물의 이력을 알 수 있다는건 이만큼이나 재밌고 의미있는 일이다. 2023. 2. 23. 가슴에 돋아난 칼로 슬픔을 자르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마음이 맞아 평생을 함께할 인연을 만나는건 힘들어진다. 그런만큼 지금 옆에 있는 한명 한명이 중요하게 느껴지는건 당연한 일. 몇안되는 인연 중 하나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서로에게 좋을 듯 하니 어쩔 수 없다. 가슴에 돋아난 칼로 슬픔을 자르고 마음을 추스른다. 2023. 2. 17. 모호한 감정의 공격 갑자기 몰려드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기쁨도 슬픔도 아닌, 두려움도 분노도 아닌, 미묘한 설레임, 어긋남, 불안함 등의 공존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뭉뜽그려진 채 굴러와 갑자기 부딪혀버린 것 같다. 그리운 어느 시절의 봄날 같기도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던 그 겨울날 눈오던 청주 기차역에 서있는 듯도 하다. 이틀전에 마신 술이 아직 안깨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이런 감정을 사진으로, 글로, 그림으로 풀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내 능력이 너무 비루하다. 2023. 2. 2. 개인주의와 중도를 참칭하는 이들에게 내가 만나고 겪었던 사람들만으로 한정해서 말하자면 개인주의자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기주의자였고 중도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기회주의자였다. 진짜 개인주의자들은 실제로는 이타적이었고 진짜 중도들은 누구보다 정치 의식이 높고 확고한 기준을 갖고 있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2023. 1. 19. 멸망을 향해 기쁜 발걸음을 내딛는 동지들에게 뜬금없이 우울한 얘기를 꺼내서 미안하지만 멸망은 이미 확정되어 있다. 그 속도가 문제인데 예상보다 훨씬 빠른 것 같다.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꾼다면 가속도를 줄여볼 수는 있겠지만 어차피 정해진 파국을 막을 수는 없을테고 무엇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바꿀 생각이 없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바껴서 막아주길 바랄 뿐이다. 뻔히 보이는 낭떠러지를 향해 기쁜 걸음을 내딛는 동지들과의 동시대를 살아가는데 대해 큰 불만은 없다. 정해진 끝에 도달하는 것은 모두 같기 때문이다. 그 끝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 두려운건 사실이지만 나 혼자 가는 길이 아니기에,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두려운게 없었기에 그러려니하고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이다. 능력있고 운이 있는 사람들은 그 점에 도달하는게 조금 늦어질지도 모.. 2023. 1. 13. 회자정리 세상에 끝나지 않는 연회는 없다. 그걸 알면서도 헤어짐이 무서워 오래전에 놓았어야 할 끈을 억지로 잡고 있었던 거다. 한 두 사람의 주도로 근근이 이어지는 모임은 그들이 마음을 놔버리는 순간 끝나는 법. 이제 나도 마음을 내려놔야겠다. 헤어졌다가 만나고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이 삶이니 또 언젠가 어디선가 다시 만나겠지요. 저도 이제 이 아쉬움을 딛고 서서 헤어짐을 받아들이겠어요. 2022. 12. 29. 동시대인이란 - 조르조 아감벤 동시대인이란 자신의 시대에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빛이 아니라 어둠을 지각하는 자이다. 모든 시대는 그 동시대성을 자각하는 자들에게는 어둡다. 따라서 동시대인이란 이 어둠을 볼 줄 아는자, 현재의 암흑을 펜에 적셔 글을 써내려 갈 수 있는 자이다. 조르조 아감벤 2022. 12. 28. 내 마음 같은 사진 흑백이 아닌데 흑백 같은 사진. 회색으로 물든 세상에서는 어떤 카메라를 들어도 흑백으로 나올 뿐이지. 내가 아무리 그게 아니라고 얘기해도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일 뿐. 2022. 12. 24. 사위다 2022년, 44살의 한해가 내 모든 열망, 수많은 미련과 함께 사위어간다. 이젠 시작보다 끝이 가까운 때. 가득차 있던 시계 속의 모래가 끝을 보일 때 더 빨리 흘러내리 듯 느껴지는 것 처럼 내 인생의 속도에도 가속도가 붙고 있다. 마지막 한알의 모래가 떨어져 내린 후 다시 뒤집어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모래시계와는 다른 것이 삶. 2022. 12. 21. 이전 1 2 3 4 5 6 7 ··· 3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