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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ary thought/As coinlover

김밥집 아들

coinlover 2019. 10. 16. 23:54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와 결혼해 바깥 생활이라고는 전혀 해본 적 없으신 어머니는 

 

호구지책으로 은행의 식당에서 일을 하시다가 갑자기 보험외판원이 되셨다.

 

붙임성 있는 성격은 아니셨던 어머니께서 그 시절의 보험 영업을 어떻게 하셨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내가 본거라고는 저녁 무렵 무거운 가방을 들고 우리 동네로 돌아오는 모습뿐이었으니까. 

 

영업에 맞는 타입이 전혀 아니므로 아마 무진장 고생을 하셨을거다. 

 

그렇게 2년여 동안 그 일 하시며 모은 돈으로 천전시장에 분식점을 개업하셨다. 

 

칠암 김밥이라는 이름의 이 식당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시절 가을 운동회 즈음에 오픈했고 

 

군 복무를 한참 하고 있던 2000년에 폐업했다. 

 

그 식당에서 나는 김밥을 먹고, 수제비를 먹고, 팥빙수를 먹고, 때로는 공부도 하고, 

 

마치는 시간이면 의자를 전부 식탁 위로 올리고 마대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내 음악 기능평가 답안지에서 팔분음표 옆에 분명히 그려 넣었던 점을 지우고 

 

음악 점수를 깎아 내 다음 등수의 학생에게 우등상을 주었던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어머니의 가게에 와서 식사를 하며 나를 보고 웃는 것을 보며

 

처음으로 김밥집의 아들인게 부끄럽고 싫어졌다. 

 

그 선생은 집이 가난한 너한테는 우등상보다는 장학금이 더 필요하다며 

 

음악 점수를 일부러 깎은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해주었다.  

 

(우등상을 받으면 졸업식 때 장학금을 주지 않는다는 희안한 규정이 있었다.) 

 

나는 그때 치명적일 정도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방과후에 학교 정글짐 꼭대기에 올라가 숨죽여 울었다.  

 

그 사건 뒤로 나는 내가 김밥집의 아들인 것을 되도록 숨기고 살았다. 

 

성당에 갔다가 집으로 오는 길에 어머니의 식당이 있었지만 함께 오던 친구들에게 들키기 싫어

 

일부러 다른 길로 둘러갔고 어쩌다 식당 앞을 지날 때도 모른 척 한 적이 많았다. 

 

우리 집의 사정을 아는 어른들이, 친구들이 나를 김밥집 아들로 부르는 게 죽기보다 싫었던 시절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은 한때 옆집에 살던 아저씨였는데 

 

학교 마치고 집에 가며 우리 식당에 들러 판매하고 있던 본젤라또 아이스크림을 한통 가져가곤 했다. 

 

물론 아들의 담임이므로 어머니께서 공짜로 줬던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모두 내게는 너무 역겨워 보였다. 

 

그렇게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 군입대 전까지의 대학 시절을 보냈다.

 

내가 부끄러워하던 그 김밥집에서 벌었던 돈으로 나는 학교를 다녔다.

 

병장 휴가를 나왔을때야 어머니께서 내게 이야기하지 않고 가게를 정리한 것을 알았다.

 

어머니의 체력에 무리가 왔고 매상도 그리 좋지 않았기에 자연스레 정리하신 것이었다. 

 

그 무렵에 집에서 독립하지 않은 슬하의 자식은 나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았기에

 

가게를 운영하지 않아도 어떻게 되겠다는 계산이 섰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김밥집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떼게 되었다.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걱정보다 상품 라벨처럼 나를 따라다니던 오명이 없어진 것이 

 

더 홀가분하게 느껴졌던 시간이다. 

 

대학 졸업까지 남은 2년 동안 집에서 큰 경제적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기에 

 

그때까지 품고 있던 만화가의 꿈은 깨끗히 접고 임용 공부에 매진했다. 

 

치열하고 달렸고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듯이 도전 첫해에 수석 합격을 했다. 

 

그 이후 나를 김밥집 아들이라 부르던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김 선생이라 불리게 되었고 

 

대체된 호칭과 함께 어린 시절의 유쾌하지 못했던 기억은 모두 사라져 버린 듯 했다. 

 

꽤 오랜 시간 잊고 살았던 이 기억들을 다시 일깨운건 결혼하고 나서 우연히 싼 김밥이었다.

 

김밥 싸는걸 배운 적도 없고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찾아본 것도 아닌데

 

너무 자연스럽게 재료를 준비하고 아무 어려움 없이 말아낸 데다가 심지어 맛도 좋았다.

 

다른 걸 물려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김밥집 아들 아니랄까 봐 김밥 싸는 재능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아들 먹여살리느라 10년 가까이 김밥을 싸셨던 어머니는 이제 예전 김밥 맛을 못 내겠다고 하시는데

 

나는 그때 어머니가 싸주셨던 김밥 맛을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어떤 것이리라. 보고 자란게 그것이므로. 

 

자연스레 말아지는 김밥처럼 나는 어느샌가 김밥집 아들이라는 호칭이 주는 부끄러움을 잊어버렸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옛날의 상처들을 이렇게 추억이랍시고 끄적일 정도로 어른이 되었다.

 

상처가 많고 소심했던 그때의 김밥집 아들은 이제 아들의 소풍날 새벽에 잠을 설치고 일어나 

 

햄을 볶고, 계란 지단을 부치고, 참기름에 밥을 비벼 김으로 말아 그의 도시락을 만들고 있다. 

 

김밥에 얽힌 나의 이러한 시시콜콜하고 유쾌하지 못한 기억과는 달리 

 

그저 맛있고 즐거운 추억만 그에게 남기를 바라며. 

 

그는 아빠인 나처럼 악에 받혀서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잊고 싶은 기억에 집착하는 일 없이 건강하게 커나가기를 바라며. 

 

아빠가 싸줬던 이 김밥이 성인이 되어서도 삶을 풍요롭게 꾸려나갈 수 있게 도와주는 하나의 취향이 되기를 바라며.

 

시간이 흘러 그가 나의 어떤 부분을 부끄러워하며 친구들에게 숨기는 순간이 와도

 

내가 어머니에게 그랬던 것에 대한 응보라고 생각하며 웃어줄 것이다. 

 

인생은 그렇게 유전되는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