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 만주벌판을 가로질러....(심양에서 송강하까지)
첫날 묵었던 3성급 호텔 국대 어항
새벽 3시쯤에 잠든 것 같은데 4시 50분에 눈을 떴다.
그 시간에 이미 밖이 밝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일찍 일어나봐야 할일도 없었던 고로
침대에 누워 한 시간 정도를 더 뒤척이다보니
창밖의 빌딩 사이로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중국에서 맞이하는 첫 아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대충 세면을 하고 바깥 풍경을 찍어대고 있으니
이귀순 선생님께서 핸드폰 로밍하는 방법을 물어오신다.
어제했던대로 알려드렸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
이상하다. 어제 대련에서는 국내 통화가 자연스레 되었는데...
결국 가이드의 도움으로 거는 통화는 앞에 0082를 붙이고 핸드폰 번호에서
제일 앞의 0을 떼야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국내에서 걸려오는 통화는 그냥 받을 수 있다. 내 경우는 전화를
받은 거라 아무 절차없이 통화가 되는 줄 알았던 것)
이래 저래 소소한 이벤트를 거치고 호텔 1층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
본인의 아침 식사(눈물의 꽃빵 ㅠ_ㅠ)
이상두 선생님 표정이 "먹을 거 참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강정중 선생님 표정이 보이는가?
"이것이 바로 현지인의 아침식사다.!"
라는 말이 온몸으로 전해 오는 듯하다.
강정중 샘은 맛있다고 드시고 계신데
옆에 계셨던 이귀순 샘께서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셨다.
"강정중 샘은 지금 생존 경쟁중이다~"
호텔 식사는 뷔페식이었는데 그래봐야 먹을건 별로.....
마음에 드는 것은 볶음밥 정도였을까 나머지는 입에 전혀 맞질 않았다.
(분명 기억에 이강웅 선생님 빵에는 팥이 있었는데 내가 고른 거에는 없었다. ㅠ_ㅠ)
다른 선생님들도 나와 별 다르지 않게 식사가 그다지 탐탁치는 않은 표정이셨다.
단 한분을 제외하고.....
마음에 드는 것은 볶음밥 정도였을까 나머지는 입에 전혀 맞질 않았다.
(분명 기억에 이강웅 선생님 빵에는 팥이 있었는데 내가 고른 거에는 없었다. ㅠ_ㅠ)
다른 선생님들도 나와 별 다르지 않게 식사가 그다지 탐탁치는 않은 표정이셨다.
단 한분을 제외하고.....
강정중 선생님 표정이 보이는가?
"이것이 바로 현지인의 아침식사다.!"
라는 말이 온몸으로 전해 오는 듯하다.
강정중 샘은 맛있다고 드시고 계신데
옆에 계셨던 이귀순 샘께서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셨다.
"강정중 샘은 지금 생존 경쟁중이다~"
"현대와 과거의 조화, 어느 나라에서건 이런 모습은 날 설레이게 한다."
대정전의 내부
대정전
대정전 앞 - 아직 유교 영향을 받지 않았는지 품계석이 보이지 않는다.
숭정전 앞의 해시계
숭정전 내부
김병기, 이진희, 이운학 선생님을 기다리며 찍은 단체 사진
중국식으로 아침을 부실하게 떼운 후 우리는 첫 관광지인 심양 고궁으로 향했다. 심양은 1625년 누르하치가 요양에서 후금을 세운후 천도한 곳으로
1636년 청태종 홍타이지가 여기서 즉위식을 올린 후 황제라 칭하며 국호를
청으로 고쳤다. (청태종 홍타이지, 우리역사에는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뼈아픈 기억을
남긴 사람이다.)
이 심양 고궁은 청이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후에는
황제의 동북 지방 순시 시 행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우리나라의 경복궁 정도는 될거라고 하는데
그래도 한나라의 정궁을 중국의 행궁에 비유하는 건 좀 그렇지 싶다.
(물론 경복궁은 조선 시기를 통틀어 정전으로 사용된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지만)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안 사실을 하나 들어보면
이 심양고궁에는 많은 보물들이 존재했는데
4번의 재난(제정 러시아군의 약탈과 파괴, 원세개의 문화재 운송,
일본인의 소장품 분산 ,국민당의 국보비밀 운송 사건)
을 거치면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곳으로 변했다고 한다.
어쨌든 아직 중국 전역을 장악하지는 못했던 시절 만주족의 풍취를
군데 군데서 찾아볼 수 있었다.(만주족 문자도 여기저기 보였던 것 같은데..)
나는 예전부터 자금성에 꼭 가보고 싶었다.
아마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를 본 이후부터 계속 생각해왔던 바였으리라~
자금성 앞에 있다는 스타벅스에서 프라퓨치노도 한잔 하고 싶었더랬다.
(ㅋㅋㅋ 이런 속물 근성이라니~ 역사 선생맞냐? 이봐 자금성 앞 스타벅스 없어진다구~~)
심양고궁을 돌아보면서 자금성에 가보고 싶다는 욕구가 더 심해졌다.
규모가 이에 비할바가 아니라는데 과연 어느 정도길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고궁 내를 관람하고 다니는데 어느 순간
이운학, 이진희, 김병기 샘이 실종되셨다.
(여행가면 이런 분들 꼭 있다~ 그래서 가이드가 깃발을 드는 모양이다.
실제로 이 때 모샘이 롯데관광 깃발 만들 것을 강력 주장하셨다.)
전체방송을 할수도 없는 것이고 해서 무작정 기다리고 앉아있을 수 밖에....
종오씨가 그분들 찾으러 다니느라 이래 저래 고생을 좀 했다.
고궁 관광을 하고 나오니 기다리고 있는 우리 버스의 위용~~
하루 탔다고 정이 들었나보다. 다른 버스들 보다 좋아보인다 ㅡ_ㅡ;;;;
심양에서의 일정은 고궁 관람으로 끝났고
이제 남은 건 송강하까지의 끝이 안보이는 여정이었다.
(중국의 발전소 굴뚝~ 강정중 샘왈 "첨성대 아니야?")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리다 10시 30분 경에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서 아이스크림을 먹게 되었다.
중국 아이스크림이라니.. 해외에 처음 나온 나는 별별게 다 신기하고 가슴 설렜다.
(내가 먹은 이 녀석의 맛은 한국 아이스크림 서주 아이스주랑 판박이다~~
아이스크림을 무진장 좋아하는 나는 욕심을 내서 두개나 먹었다.^^;;;)
송도하까지 가는 길에는 끝도 없는 옥수수 밭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너무 맑았고 역시 대륙이라 그런지 산지 보다는 평지가 눈에 많이 들어왔다.
13:30분에는 포도주가 유명하다는 통화에 들러 점심을 먹게 되었다.
중국에서 무슨 포도주냐고 생각하겠지만 여기 포도주 주조 전통이
100년에 달한다고 한다. 기회가 되었으면 한잔 하는건데~
지금에 와서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이다.
식사를 한 곳은 역시 조선인 식당이라는 메아리 식당,
나는 개인적으로 여기서의 식사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마치 한국에서 밥을 먹는 듯한 느낌(두부요리도 괜찮았고 말이야~~)이었다고 할까~
여기서도 술은 빠지지 않았지만 우리 자리는 비주류파였던 지라 몇잔 마시지는 않았다.
(나중에 결정난 공식이었지만 화일권 선생님이 계신 곳은 주류파~
강정중, 이두만 선생님이함께 계신곳은 식신(食神)파였다~)
만족스럽게 식사를 하고 나오니 식당 옆에 과일 행상이 있었다.
이운학 선생님께서는 30시간에 달하는 중국어 연수를 받으신 고로
현지인에 가까운 중국어 회화실력을 가지고 있으셨다(라고 이두만 선생님께서 생각하셨다.).
중국와서는 그 실력을 전혀 보이지 않으시더니 이때 과일행상과 중국어로 가격을 흥정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때 선생님 뒤로 비치는 후광이라니~~
(선생님~ 중국어 30시간 연수는 헛된 것이 아니었군요 ㅠ_ㅠb)
잠시동안의 즐거운 시간을 뒤로한 채 우리는 또 기약없는 버스 여행길에 올랐다.
너무 지루하셨던 나머지 몇몇선생님들께선 手談을 나누기 시작하셨고
조용했던 버스는 어느새 활기로 가득차게 되었다. 통화에서 샀던 고량주 몇병이
즐거운 분위기에 윤활유 역할을 해주었다.
중국을 여행하면서 참 독특했던 점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돈을 낸다는 것이었다.
통행세 개념이었던 것 같은데 중국사 시간에 배운게 얼핏 기억이 났다.
이 통행세는 외국 상인들에게도 적용되었었는데 아편전쟁(인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이후 외국 상인들에게 적용되던 통행세는 폐지되고 내국인에 대한 통행세만
유지되어 중국 상업이 몰락하는데 일조를 했었다고 한다.
어쨌든 몇번인가의 통행세를 내고 쉼없이 달려가는데
도로 사정도 안좋아 불안하건만 중국 사람들은 차에 대한 겁도 상실했는지
오토바이가 버스를 막아서기도 하고
심지어는 중국 오리와 그 새끼들까지 우리 버스를 막아섰다~ ㅡㅅㅡ;;;;;
한참을 달리다 화장실 급한 사람들을 위해 들린 휴게소
수세식 화장실 완비~ 라는 한글이 우리를 반겼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행을 자주 오는 백두산 근처로 오니
한국어도 많이 보이고 지역 주민들도 간단한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것 같았다.
단장님께서 쏘신 냉커피 한모금씩을 마시고 다시 길을 떠나
드디어 도착한 곳이 송강하~~ 정말 길고 긴 여행이었다.
우리 버스 기사님이 워낙 운전을 잘하셔서 예정시간 보다 30분이나 일찍
저녁을 먹을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이름은 상평주점~
일찍 도착했던 이유로 식사 준비가 안되어 단체로 식당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송강하 지역은 아직 개발이 많이 덜된 지역이었다. 원래 백두산 인근 지역이
누르하치의 가문 애신각라씨의 발원지라 봉금 지역으로 설정되어 있었고
여기 사람이 산지 얼마 안되었던 것도 발전이 더딘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여기 풍경은 우리나라 70년대 정도의 모습 같았는데 특히 인상적이었던게
전완성(우리 말로는 오락실) 이었다.
우리 집 본관이 하동 진교였던 터라 어렸을때 방학은 항상 진교에서 보냈었는데
80년대 후반 진교에서 자주 갔던 오락실과 분위기가 아주 비슷했다.
오락실 내부에 멀쩡한 오락기라고는 4대밖에 없었는데
(천지를 먹다2, 뇌전 라이덴1, 킹오브파이터즈96)
모두 우리나라의 90년대를 풍미했던 것들이었다.
송강하의 낙후된 모습에 왠지 마음이 짠~해있는데 어느새 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