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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inwalker

진주시 칠암동을 걷다

coinlover 2020. 10. 15. 07:42

 

어린 시절 국어공부하러 갔던 배달말 웅변학원(지금 위치는 세번째 옮긴 곳). 

내가 생애 최초로 가봤던 학원이고 정말 많은 것을 배웠던 곳. 

원장님이 같은 칠암성당 신자여서 학원비를 못내도 별말 없이 계속 다니게 해주셨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언어영역에서 많아 틀려야 한두개 정도였던 실력은 

여기서 다져놨던 읽기 쓰기에 대한 소양 때문이었을 것이다. 

원장선생님에 대해 남아 있던 대단히 인상적인 기억은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내게 가르쳐주셨던 내용 중 잘못된 것이 있었는데 내가 그걸 말하자

바로 책을 찾아보시고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셨다는 것.

교사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잘못된 개념을 가르치는 일이 생길때마다

빨리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은 그때 원장선생님이 보여주신

태도가 워낙 인상적이어서 내게도 깊이 심어져버린 원칙이 아닌가 싶다.

 

 

천전국민학교 가는 길. 

어린 시절의 내게는 아주 낯설고 먼 길이었다.

토요일마다 이 길을 반대로 지나 칠암성당에 미사를 보러가곤 했는데

그게 어찌 그리 멀게만 느껴졌는지.

한 겨울 미사마치고 돌아오던 어두운 길은 지금 생각해도 꽤 스산했던 것 같다.  

 

국민학교 6학년 말에 참 친하게 지냈던 준석이네가 있는 골목. 

중학교 진학하고 나서는 아무 이유없이 소원해져버렸지만

그 집에서 1박하며 패미콤 게임을 즐겼던 그 날은 내 인생에서 제일 즐거웠던 하루였다.  

 

 

천전초등학교 정문. 

많았던 문방구들은 코로나19 탓인지 거의 다 문을 닫아버렸다. 

유리 진열장 밖에 서서 한가득 쌓여있는 프라모델들을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나. 

추석, 설날이라든가 학교 운동회하던 날이면 어른들께 받은 용돈으로 

아카데미제 드라고나, 칸담 시리즈를 사모으던 내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이때의 프라모델들은 반다이의 금형을 배껴서 만든 조악한 수준의 것이었고

스냅키트도 아니어서 동봉된 접착제를 이용해 만들어야 했다.

손톱깎이로 부품을 러너에서 떼어내 조립하는 것은 국민학교 저학년에겐

꽤 어려운 일이었을텐데 어린 시절의 나는 그걸 참 잘했다.

동네 아이들이 프라모델만 사면 내게 조립을 부탁하러 올 정도였으니.

그 무렵의 내 손가락에는 본드 흔적이 사라질 날이 없었던 것 같다.

방학이 가까워질 무렵이면 학교 앞에서 63빌딩이나 마산 돝섬 관광 책받침을 나눠주던 사람들이 기억난다. 

두군데 모두 너무 가보고 싶어 사진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얼마나 폈던지. 

마산 돝섬은 대학교 시절 동기들이랑

63빌딩은 작년에 가족들이랑 가보긴 했지만 그 시절의 생각만큼 멋지지는 않더라.  

마음 속 깊이 바래왔던 것들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잊혀지지 않고 

결국은 이뤄지기 마련이다. 

중요한건 소중했던 감정들이 변치 않게 보존해두는 것.

삶은 항상 그랬다. 

천전초등학교 본관. 

흰색과 초록색으로 꾸며져 있던 학교는 좀 더 알록달록하게 변했고 

커버린 내게는 예전보다 작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쪽 출입구를 통해 하교를 하곤 했다. 

내 기억 속에서 항상 그늘진 느낌으로 남아 있는데 아마 저 나무 때문인 듯 하다. 

꿈에도 가끔 나오곤 하는 풍경인데 지금도 거의 변하지 않는 모습이라 깜짝 놀랐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남아 있는 공부하는 어린이 상.

본관 뒷편에는 이승복 어린이상도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유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하형주씨가 동문이었다. 

어린시절 참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에 철봉 거꾸로 오르기를 못해서 선생님께 야단을 많이 맞았다.

너무 높아 공포스러워보였던 철봉은 지금의 내 가슴팍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철봉 뒤로 보이는 씨름장 또한 내게는 유쾌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키가 크고 덩치가 있어 항상 씨름 대표로 뽑혔는데 

나는 운동신경도 없고 씨름을 엄청나게 싫어했던 터라 

그런 일들이 너무 큰 고역이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1년을 보냈던 천전초등학교 별관. 

국악을 하시던 강학진 선생님께서 담임을 하셨던게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수업시간에 3자리수 곱셈 문제를 풀지 못해서 엄청 부끄러워했는데 

그때부터 이를 악물고 공부해서 5학년, 6학년때는 계속 우등상을 받았다. 

용돈만 받으면 프라모델을 사던 내가 이 시기에는 다달학습, 표준완전학습과 같은

문제집을 사서 푸는데 집중했었다. 쌓여가는 문제집 권수가 훈장같이 느껴졌던 시절.

5학년때는 전과목에서 백점을 받았는데 담임선생님께서 한턱 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셔서

보험회사에 다니시던 어머니께서 하루 휴가를 내고 학교에 뭔가를 바리바리 싸들고 오셨다.

그 이후 어머니를 힘들게 하지 않아야겠다 싶어서 아는 문제임에도 한개는 꼭 틀리곤 했다. 

본관에서 별관으로 이어지는 우천도로길 앞에는 정글짐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져 버렸다. 

그 정글짐 위에 올라앉아 많은 생각을 했던게 기억난다. 

그래도 그 옆의 나무는 세월을 그대로 간직한 채 머물러 있었다. 

천전시장 초입부에 있던 어머니의 가게는 이상한 가건물들이 덕지 덕지 붙은 상태의 청과물상으로 변해버렸다. 

1992년 천전초등학교 가을운동회 날 어머니는 다니던 보험회사를 그만두시고 칠암김밥이라는 분식점을 내셨다. 

김밥과 수제비, 떡볶이, 칼국수를 주메뉴로 하셨는데 장사가 잘됐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나는 대학교 입학까지 무사히 할 수 있었다. 

저녁무렵 어머니께서 가게 정리를 하실 무렵에 나는 대걸레를 들고 바닥 청소를 했는데

어린 마음에 그게 너무 힘들고 싫었다. 그래도 거의 매일 어머니를 도왔고 

가게 셔터를 내리고 집으로 함께 돌아올 무렵에야 하루가 무사히 마쳤음을 느끼곤 했다. 

남순경집이라고 불렸던 구멍가게. 

주인분이 은퇴한 순경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던거겠지. 

여기는 근처에 있는 가게들 중 유일하게 100원-500원 상당의 프라모델을 팔고 있어서 

용돈 받으면 자주 뛰어 왔던 곳이다. 장사를 하지 않은지 몇년이 지났지만 건물은 옛기억 그대로 남아 있다.  

어린시절 친구였던 중관이네.

어머니끼리도 같은 성당신자이고 꽤 친하셔서(지금도 친하시다.) 자주 놀러갔던 것 같다.

1층에는 이발소가 있었는데 내 머리를 깎아 주시던 장발의 멋쟁이 이발사 아저씨는 잘 지내시는지 모르겠다.

대학교 시절에 아저씨의 근황이 궁금해서 들렀을때는 여전히 멋진 미소를 보여주셨는데.

그때도 지금처럼 사진을 찍었더라면 아저씨를 모델로 꽤 괜찮은 시리즈를 만들 수 있었을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같은 성당 다니던 해조형의 집.

어머니 가게에 청소하러 올라갈때마다 저 집 옥상에서 반갑다고 손흔들어주던 해조형의 안경낀 얼굴이 생각난다.

마지막으로 만났을때는 교사임용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딘가의 학교에서 선생님이라고 불리고 있을지.

내가 칠암동 살던 시절을 기준으로 꽤 고급 잡화가게였던 황금슈퍼가 있던 곳.

주위에 있던 다른 구멍가게와 다르게 새로 지은 건물에다 신상 과자도 많아서 너무 좋아했다.

슈퍼조인트라는 식완(껌같은 작은 과자와 함께 장난감이 들어있는 제품)을 다 모으기 위해

한겨울의 추위를 마다하지 않고 들락날락 거렸던.

배달말 웅변학원의 옛건물 앞이였기에 원장님이 간식을 자주 사주셨던 곳이기도 하다.

나보다 한살 많았던 민재형의 할머니께서 운영하셨던 담배가게. 한때는 문화상회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는데

이제는 길모퉁이 편의점이 되었다.그래도 건물 형태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 집은 담배가게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실제로 동네 어른들이 담배사러 자주 들리던 곳이다.

(가게 안쪽의 방은 동네 할머니, 아주머니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었고.)

나 또한 아버지의 담배 심부름을 자주했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아버지는 술을 드시진 않았지만 담배는 무척 좋아하셨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는 금연을 권하셨다.

직접 담배를 사러갈 수 없었던 아버지께서는 일하시면서 사둔 담배가 떨어진 주말이면

내게 담배 심부름을 시키셨다.

멋모르던 나는 아버지가 주셨던 용돈이 좋아 기쁜 맘으로 담배를 사오곤 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아버지의 삶을 더 단축시킨게 아닌가 싶어 마음이 아려온다.

아버지가 즐겨피던 담배 솔의 그 포장지가 아직도 가슴에 콕 박혀있는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가게 왼쪽 편에는 민용이 형이 살고 있었는데 어린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꽤 자주 놀아줬던 좋은 형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어머니는 불량학생이라고 어울리지 말라고 하셨지만.

어머니 지갑에서 만원을 훔쳐 형이랑 같이 놀러다닌 기억이 난다.

그때 시내에 있는 일천냥이라는 식당에서 먹은 돈가스는 왜그리 맛있었는지.

 

마지막으로 돌아본 곳은 옛날 우리집 터 맞은 편에 있는 칠암곰탕건물.

이 집은 어린시절 친구 비슷한 동생이었던 서영이가 살던 집이었다.

옛집을 허물고 빨간 벽돌집을 새로 지었는데 그때 1층에 들어온 칠암곰탕은

지금까지 30년 가까운 시간을 운영하며 진주지역의 맛집으로 거듭났다.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모두 담겨 있는 칠암동 502-15번지의 집은

경남문화예술회관의 주차장으로 변해 사라졌지만

칠암곰탕 건물이 남아 있어 우리 집이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는게

참 다행스럽다.

그때는 신축 건물이라서 동네 사람들의 부러움을 많이 샀는데

이제는 세월의 흔적이 완연한게 묘한 느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