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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by day

변질되는 추억들

coinlover 2020. 9. 6. 21:08

 

 

 

MBC에서 방영했던 나디아는 당시 중학생이었던 내게 신선한 문화충격으로 다가왔고 한동안 빠져나오기 힘들 정도의 몰입감을 선사했었다. 나디아가 종영된 다음해, 당시 같이 만화를 끄적이던 곽군이 어렵사리 구해온 알파라는 화집을 통해 나디아의 캐릭터 디자이너가 유시유키 사다모토라는 걸 알게되었고 아크릴 과슈로 그려낸 그의 환상적인 그림에 매료되어 내가 완성할 그림체의 지표로 삼으며 뒤쫓기 시작했었다. 그의 명성을 정점에 올려놓은건 역시 세기말의 대히트작이었던 신세기 에반게리온. 아야나미 레이와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라는 불멸의 캐릭터를 디자인한 그는 나에게 너무 높고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사르는 동안 단 한번도 내 마음 속의 넘버원 자리를 뺏긴 적이 없었던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 유시유키 사다모토. 그가 작년에 소녀상과 관련된 발언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공적으로 몰렸고 그의 작품 세계를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이 멘붕에 빠졌다. 물론 나 역시 그 중 하나였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작가는 미워해도 작품은 사랑할 수 있는가? 일본은 미워해도 그 문화는 즐길 수 있는가? 일본 문화가 개방되지 않았던, 아직 한국의 만화나 장르문학이 일본의 그것을 쫓아가지 못하고 있었던 시절부터 좁고 좁은 암흑의 루트로 들어오던 만화책, 설정집 등을 통해 그림을 배우고 만화가의 꿈을 키우던 우리 세대에게 일본문화는 벗어나기 힘든 굴레와도 같았다.  그 시절부티 지금까지 우리가 사랑했던 많은 것들이 일본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걸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유니클로를 버리고 일본 맥주를 멀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이미지들마저 끊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일본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져버린 지금도 문화나 취미의 영역은 정치와 분리된 것이라는 애매한 입장을 취하며 현실을 애써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사진이나 소설, 만화 등 서브컬쳐와 관련된 것들에서 일본의 것을 무조건 배척해내지는 못할 것이다(다행스럽다고 해야할까? 요근래 일본의 서브컬쳐 수준은 바닥을 기고 있는 상태라 새로 관심을 갖게될 일은 거의 없을 것 같다. 뭐가 나오든 그 밥에 그나물이 되어버린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까.  새로 나오는 일본 영화나 애니메이션은 보는게 고역인 수준. 마음에서 정리해야할 것은 어린시절의 추억과 관련된 것들 뿐인 것 같다.). 하지만 우익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까지 끌어안아 낼 자신은 없다. 유시유키 사다모토의 흔적을 마음 속에서 생활 속에서 지워가고 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입장이 다른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독자를, 팬을 모독하는 그 마음까지 품고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품 세계로 한 국가가 아닌 세계 전체에 영향을 끼친 사람은 삶에 있어서도 현명한 태도를 보여야한다. 기교는 정점에 이르렀되 마음은 곪고 곪아 있었던 그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는건 아직까지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일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