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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규 발령받았을 때는 초심자에 대한 배려라는 어드밴티지가 있었다. 

 

그래서 남해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그 어떤 편견도 없이 이해받았던 것 같다. 

 

2.

 

첫 발령지에는 고등학교 시절 은사님들께서 많이 계셨다. 

 

그래서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고 

 

언제나 데리고 다니시며 챙겨주셨다. 

 

일이 힘들었을지언정 인간관계가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3. 

 

진주고등학교로 옮긴 이후에도 상황은 같았다. 

 

모교였고, 학교 선배님께서 부장을 맡으신 학년의 기획으로 업무를 시작했으니 

 

열정에 넘쳤고 모든 부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여전히 같은 학교에 은사님들이 많이 계셨고

 

학교 선배님들도 많으셨기에 모두들 내게 우호적이었다. 

 

4.

 

고성중앙고로 전근 간 후에도 비슷했다. 

 

고1 때 담임 선생님께서 교무부장을 맡고 계셨고 같은 부서,

 

같은 학년에서 일을 시작했기에 적응이 쉬웠다.

 

이전 학교에서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들이 계셨고 

 

좋게 봐 주신 분들이 많아 학교 생활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5.

 

통영여자고등학교로 옮길 때는 고민이 많지 않았다.

 

집 근처에 있는 데다가 이 학교 외외에 전근 갈 곳도 가고 싶은 곳도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로 옮기고 나서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곳은 이전 학교와의 접점이 전혀 없었다. 

 

나를 아는 이는 거의 없었고 사람들의 말과 행동, 업무 처리 방식이 너무 낯설었다.  

 

지역 문화, 학교 문화가 이전에 근무했던 곳과 확연히 달랐다. 

 

인성부장이라는 직책 또한 학교를 옮기면서, 이 학교를 모르는 상태에서 맡기엔 부담스러운 중책이었다.

 

외로웠고, 불안했고, 힘들었다. 

 

이곳 선생님들이 내게 낯선 존재였던 만큼 

 

나도 그들에게 낯선 존재였다. 

 

내 말과 행동이 내 의도에 맞게 번역되지 않았고 

 

그들의 말과 행동이 그들의 의도에 맞게 내게 전해지지 못했다. 

 

 

6. 

 

그렇게 4년이 지나버렸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나는 교직 생활 16년 차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의미의 홀로서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남해제일고에서, 진주고등학교에서, 고성중앙고에서 

 

나는 언제나 나를 이해해 주는 은사님들, 선후배들에 둘러싸여 있었기에

 

주변부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못했다.

 

하지만 아무 연고가 없는 이 지역에 와서야, 아무 기반이 없이 홀러 내던져진 이후에야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이해와 도움 속에서 살아왔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겨우 남은 교직 생활 동안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