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달은 붉은빛을 가로등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던 늦은 밤. 피곤으로 늘어진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명문학교에서 근무 중이라 생전 처음 추석 연휴 전날 야자감독을 해봤다. 일찍 마치고 진주로 넘어가 홀로 계신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학생 2명을 데리고 앉아 있자니 이게 뭐 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께 시간이 늦어서 내일 넘어가겠다는 전화를 드리고 텁텁한 마음이나 달래자 싶어 평소 가보고 싶었지만 늦게 오픈하는터라 가보지 못했던 지하실에 들렀다. 

 

 

완전히 쇠락해버린 항남 1번가 골목. 한때는 통영 상권의 중심이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폐업한 가게들의 모습이 뭔가 애잔해보인다. 기획을 잘해서 꾸미면 통리단길 같은 명소로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참 아쉽다.

 

 

 

문닫은 가게들 사이를 헤매다 찾은 작은 간판. 큰 길에서 찾아 들어오는게 나을 뻔 했다. 

 

 

입구가 내가 좋아 하는 녹색으로 도색된 되어 있어 들어가기 전부터 기대감이 고조되었다.

 

 

인스타 피드로 봤을때는 좁고 습한 곳이 아닐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넓고 쾌적해서 좀 놀랐다. 지하의 쿰쿰한 냄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인센스 향이 강하게 풍겨 나왔다.  

 

 

 

 

인스타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며 돈 벌어서 위스키에 때려 박는 덕후 사장님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실제로 보니 틀리지 않았다. 인근 지역에서 이만큼 다양한 위스키 라인업을 갖춘 업장을 만나긴 힘들 것 같다. 

개업한 지 3달쯤 됐는데 홍보도 거의 안 한 데다 오픈도 늦게 해서 손님이 별로 없었을 듯했는데 빈 보틀이 꽤 있다. 맥캘란12가 제일 많이 팔린 것 같다. 손님들이 드신 건지 사장님이 드신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가게 인테리어가 맘에 들었다. 몰트바가 아니라 살롱 같은 분위기. 적당히 어두운 조명, 적당한 음량의 BGM, 탈통영급 장소임에 틀림없다. 불두 장식이 너무 맘에 들어서 집에 붙여놓고 싶어졌다. 미륵미륵 사장님이 기증한 건 아닌지 의심된다. 

 

내가 마신 위스키 라인업, 주문하면 예쁜 나무 트롤리에 위스키 보틀을 담아와서 따라주신다. 글렌알라키 10CS 배치7은 너무 구하고 싶었던 위스키라서, 야마자키12와 히비키 하모니는 그 맛과 부드러움으로 정평이 나있는 것들이라 주문해봤다. 

 

위스키 기본 셋팅. 견과류, 샤인머스켓과 포도, 물 한잔.

 

저녁을 못먹어서 안주를 부탁드렸더니 이런 걸 내주셨다. 실패하지 않는 단짠의 조합 하몽프로슈토와 각종 치즈들. 가격은 1인당 만원. 

많은 위스키 유튜버들이 입을 모아 칭송했던 글렌알라키 10CS(배치7)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나쁘진 않았지만 이게 이렇게 까지 품귀를 빚어야 하는 위스키인지 잘 모르겠더라.  

 

 

실패하지 않는 히비키 하모니. 그 부드러움과 풍미의 조화로움은 하모니라는 이름이 딱 적당한 듯.

 

 

위스키만 마시기 아쉬워서 기네스 생맥도 한잔.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야마자키12. 마시는 순간 머릿속에 종이 울리는 줄 알았다. 히비키 하모니도 충분히 좋았지만 야마자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한 모금 머금는 순간 고개 끄덕여지는 맛. 역시 내 미각은 친일파인지 위스키도 일본 꺼에 경도된 듯하다. 30ml에 3만 5천 원이었지만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던. 그냥 보틀째 마시고 싶었다. 

 

안주 잘 주워먹고 있으니 사장님께서 내주신 무화과. 

 

 

 

좋은 곳에서 좋은 술을 마시다 보니 우울함이 에어링 되어 버린 듯 지친 몸에 활기가 도는 게 느껴졌다. 통영에서 만나기 힘든 힙한 분위기, 다양한 위스키 라인업, 친절하고 인심좋은 사장님의 삼박자를 갖추고 있는 곳인데 생각보다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위스키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강하게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