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천장(知らない天井).
고2때 처음 봤던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 2화의 제목이다.
주인공인 신지가 낯선 환경에서 겪는 심리적 공황상태를 잘 표현했던 그 에피소드의 내용이 기억에 오래 남아
어딜 가든 하루를 묵게 되면 꽃 그곳의 천장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기는 버릇이 생겼었다.
그 이후 24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만났던 수많은 천장들 중에
(사진 같은건 찍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눈앞에 있는듯 선연하게 떠오르는건 춘천102 보충대 강당의 그것이다.
1999년 10월 5일, 입대 첫날, 내무반에서 다 수용해내지 못할 정도로 많은 장정들이 입영했던 터라
절반의 인원은 강당에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청해야했는데 나도 그 중의 한명이었다.
낯선 환경에서 제대로 씻지도 못한채 누워 불이 꺼진 강당의 천장을 바라봤던
그때 느꼈던 감정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경험해보지 못한 막막함이었다.
어둠 속에서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던 강당의 골조 프레임들이
나를 내려 누르는 듯 숨막혔던 저녁을 어떻게 견뎌내고 전역까지 했는지 생각해보면 아득하기만 하다.
기억의 흔적을 더듬어보니 그때의 나는 내일을 미리 상상하며 두려워하지 않고 순간 순간에 집중함으로써
고통으로 가득했던 질퍽한 시간의 땅을 꾹꾹 밟으며 지나왔던 것 같다.
처음 만나는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무늬가 춤을 추며 여러 형상으로 피어나기도 했고
또 수많은 기억들이 조합되어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느꼈다.
안정되지 않았던 시절의 삶은 힘겹긴 했지만
가진 것이 없었기에 무모하게 덤벼들 수 있는 용기를 제련하며 상상력을 키워나가는 기간이기도 했다.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되면서 낯선 천장을 바라보며 잠을 청할 일은 현저히 줄어
언제나 같은 천장 아래서 변함없는 나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십여년 정도 이런 생활을 하다보니 가슴 속에 새로운 두려움이 생겨났다.
평안에 익숙해진 나는 예전처럼 낯선 천장을 맞이하는 시기를 다시 버텨낼 수 있을까?
가진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많은 것을 손에 쥐고 있는 나는
이미 새로 시작하는 것이 무서운 보수적인 사람이 되어버렸다.
하루 하루 자극적인 것을 바라며 권태로운 나날을 아쉬워하고 있지만
정작 완벽하게 새로운 것을 접하는 것은 견뎌내지 못할만큼 타성에 젖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격변하는 시대,
무른 땅에 박아놓은 팩 하나에 의존한 위태로운 안정감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해왔던 것을 반복하기만할 뿐 무엇을 새로 시작해야할지몰라 괴로워하는 내게 제일 필요한 것은
낯선 천장을 바라보며 새로운 영감을 떠올렸던, 내일 해야할 것에 대한 각오를 다졌던
막막하지만 어떻게든 버텨나갔던 그 시절의 담담함이다.
아무것도 가진게 없었기에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도 한숨 한번 쉬고 일어나 부딪혔던
백지 같았던 예전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때가 다가온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 시작한다고 하면 갖고 있는 책이나 물건을 정리하기 일수였지만
내가 버려야할 것은 물질적인 욕망이 아니라 내 속에 버거울 정도로 가득차있는
쓸데없는 지식과 편견이라는 걸 이제야 안다.
올해부터 나는 다시 삶의 초년생으로서, 도전하는 사람으로서
낯선 천장에서 밤의 이슬을 피하는 사람으로서 매순간을 살아갈테다.
굳어버린 점토처럼 가슴 속에 숨어 응어리져 있는 새로운 컨텐츠 창조를 위한 욕망,
그곳에 다시 물을 뿌리고 주물러 어떤 형태로든 조형해낼 수 있는 유연함을 다시 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