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인러버의 다락방
조금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 파일롯트 커스텀743, 이로시주쿠 잉크 죽탄 본문


















결혼식 축의금에 대한 답례로는 조금 과한 것 선물을 받았지만 그 성의를 돌려보내기는 그래서 그냥 쓰기로 했다. 평소부터 파일롯트 만년필은 하나쯤 갖고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손에 넣게 될 줄은 몰랐네. 중학교 시절부터 만화를 그렸다.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국산 3N 펜촉에 파일롯트 잉크를 찍어서 펜선을 입혔다. 구력이 조금씩 늘어가면서 3N펜은 제브라 스푼펜, G펜으로 바껴갔지만 만화 그릴 때 사용했던 잉크는 항상 파일롯트였다. 20대까지의 나는 당연한 미래로 만화가의 삶을 꿈꿨고 파일롯트는 내게 단순한 잉크가 아니라 미래를 이어갈 삶의 수단이었다. 다른 네임드 만년필들은 필기구보다 명품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파일롯트는 확실히 문구류 포지션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래서 비싼 돈 주고 선뜻 고급 라인의 제품을 사긴 애매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언제나 필기감, 즉 기능성 하나는 다른 만년필을 상회하리라는 신뢰감을 갖고 있었다. 파일롯트 만년필 중 중상급 포지션을 갖고 있는 나름 대형촉(15호)의 커스텀743을 써보니 그 예상이 확신으로 바꼈다. 일본 만년필 특유의 경성 펜촉이지만 부드러운 필기감이 일본식 표현으로 정말 절품이다. 파일롯트에는 파일롯트 잉크지 하는 생각에 이로시주쿠 죽탄을 채워넣고 성경 필사를 해보니 거슬리는 느낌 전혀없이 글이 흐른다. 필사용으로 주로 사용하고 있던 다른 펜들에 비해 넘사벽의 필기감을 보여준다고 보긴 힘들지만 잉크의 흐름에 일관성이 있다는게 좋다. 배럴이 조금 더 두꺼웠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상급 대형기의 영역이니 욕심내지 않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