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파트 앞 CU 편의점 사장님은 술에 진심이다. 근처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생전 처음 보는 술병들이 카운터 옆에 빼곡히 들어차 있다. 무슨 전시회라도 여는 줄 알 정도다. 때때로 그 진심 덕분에 의외의 득템을 하기도 한다. 다만, 갈 때마다 같은 곳에 같은 모습으로 서있는 패키지들을 볼 때면, 아무 상관없는 나조차 괜히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사장님, 재고 관리 이대로 괜찮으신가요…
어쨌든, 집에 들어가는 길. 맥주나 한 캔 사갈까 싶어 무심히 들어갔다가, 뜻밖의 녀석을 마주쳤다. 간바레 오또상 홈술 도쿠리 세트. 발매 소식도 모르고 있었는데, 괜히 운명처럼 느껴져서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었다. ‘아빠 힘내세요’라는 이름답게 이 사케는 불황기에 등장한 저렴한 술이다. 일본에서는 그다지 존재감 없는 상품이지만, 한국에선 꽤 많이 팔렸다는 전설 같은 소문이 따라붙는다.
생각해보니, 내가 처음으로 마셔본 사케도 아마 이 녀석이었을 거다. 일본 술이라고 하면 흔히 생각하는 준마이? 아니다. 정제 알코올이 들어간 혼죠조, 즉 주정 첨가주다. 하지만 나처럼 미각이 대단치 않은 사람에겐 순미주이니 정미율이니 그런 구분이 큰 의미가 없다. 그냥 그저 그런, 마실 만한 사케로 기억될 뿐이다. 어디까지나 술은 어떤 분위기에서 어떻게 먹는가가 중요하다. 근처 일식 주점에서 배달시킨 큐브스테이크와 야끼소바를 상 위에 펼쳐놓고, 간바레 오또상을 한잔 따라보았다. 그러자 순간, 우리집이 이자카야가 됐다. 조명이 은은했고, 창문 너머엔 저녁 바람이 불었다. 아주 잠깐, 오늘도 괜찮은 하루였다는 기분이 들었다. 행복이라는게 별 거 아니다. 간바레 오또상. 세상의 모든 아빠들 힘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