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커피 헤비드링커는 아니라서 원두를 200g 정도씩 소량으로 구매하기에 가끔 원두가 없는 아침을 맞이한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캡슐커피를 마시는데 이게 놀라울 정도로 맛이 없다. 불과 3달 전 네스프레소로 커피에 입문해 만족스럽게 마시고 있었던 나였거늘. 좋은 것에 익숙해지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만고의 진리다. 다양한 분야에서 취향만 고급화되는 게 무섭다. 작고 소중한 내 월급이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다. 와이프 말대로 학창시절에 만화가 같은건 꿈도 꾸지 말고 공부만 해서 훌륭한(이라고 쓰고 돈 잘버는 이라고 읽는다.) 사람이 됐어야 하는건데.

 

 

 

 

 

트레져스 통영에서 필터커피 한잔 하려고 앉아 있으니 동포루 위로 적란운이 솟아올랐다. 비행기라도 한대 날아주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한 시간 동안 새 한 마리 날지 않더라. 

 

 

 

코스타리카 라 미니야 빌라사치 애너로빅 내추럴.

컵노트는 시나몬, 정향, 바닐라, 그린애플. 

진짜 시나몬이다. 직관적인 시나몬. 마시자마자 바로 느껴진다. 컵노트에 적힌 향미에 그대로 동의한 건 거의 처음이라 신기했다. 계피 향미를 가진 과일차, 기괴할 것 같지만 의외로 괜찮은 조합이다. 다른 커피를 마실 때는 산미에 이어 고소함이 들어온다 느꼈는데 이 녀석은 둘이 동시에 입안에 머무는 듯했다. 정향이라는 향신료는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이 커피의 어떤 부분이 거기에 매칭되는지 찾아낼 수 없었다. 수업 시간에 정향을 가르치면서 정향의 느낌은 모르다니.  

 

 

 

매주 한 번은 들러 필터 커피를 마셨더니 매니저분이 알아보셨나 보다(사실은 지난주에 시드라 마시고 감동해서 나갈 때 너무 맛있었다는 말씀을 드렸다 ㅎ) 초코케이크를 서비스로 주셔서 황송한 기분이었다. 커피에 주력하는 카페에 가서는 디저트를 시키지 않는 편이다. 커피 자체의 맛을 느끼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달달한 디저트와 함께 먹을 때는 약간 쓰고 고소한 맛이 강한 커피라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했고 베이킹을 직접 하는 카페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받아오는 거면 굳이 맛볼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도 있다. 트레져스 통영에서도 디저트를 따로 시킨 적이 없었는데 서비스로 주신 케이크가 너무 부드럽고 맛있어서 찾아보니 부산의 디저트 맛집이라는 선번에서 만든 것이었다. 

 

 

 

커피가 바닥에 살짝 남았을 때 위스키 한 모금 분량을 따라 온더락으로 마시면 그게 또 각별한 맛이다(트레져스에서 필터커피를 시키면 내주는 잔이 온더락 글라스로도 잘 어울리는 모양이라 그런지도). 이래서 아이스커피를 포기하기가 힘들다. 

 

 

 

지난주에 들러서 너무 좋은 시간을 가졌던 죽림의 공감로스팅팩토리에 가서 공감시그니쳐블렌드 100g을 샀다. 사장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돌아와 19g의 원두를 분쇄해 38g의 에스프레소를 추출해 아메리카노를 만들었다. 풀시티에 가까운 로스팅이라고 하셔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산미는 거의 느낄 수 없었고 정말 고소하고 씁쓸하고 달았다. 다른 원두로 마실 때보다 물을 조금 더 타야 할 정도. 내가 평소에 마시는 커피와는 결이 많이 달라 조금 힘들었다. 커피나 위스키는 취향의 영역이기 때문에 좋고 나쁨도 개인마다 다르다. 이 커피가 나쁜 건 아니었지만 내게는 맞지 않았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3달 전에 캡슐 커피 정도면 충분히 맛있다고 말했던 게 나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