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지난 연휴 때는 이런저런 일로 발이 묶여 아무것도 못했었기에 이번에는 만사를 제쳐두고 아무 생각 없이 서울로 달렸다. 원래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에드워드 호퍼전을 보는 게 목적이었으나 매진이라 실패. 서울 도착해서는 코엑스 아라비카에서 커피나 한잔하려는 순진한 생각으로 갔다가 폭우 + 부처님 오신 날(근처가 봉은사) 콤보로 교통 지옥 속에 갇혀 있다가 겨우 탈출했다. 코엑스 앞에서 겪은 아비규환은 내 운전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경험 중 하나였다. 
 

 
꿩 대신 닭으로 선택한게 DDP에서 열리고 있는 브리티쉬팝아트전. 데이비드 호크니 이름을 강조하고 있길래 그의 작품이 주류를 이루겠지 하는 얄팍한 생각을 했다. 사실은 7시간 넘게 운전을 했더니 아무 데라도 차를 세우고 싶을 뿐이었다. 
 

 
 
주차장에 차 대고 나오니 바로 반겨주는 회전목마. 비오는 날. 무채색 건물 한가운데 컬러풀한 게 돌아가고 있는 게 묘하게 아름다워서 한참을 찍고 있었다. 드디어 땅을 밟았다는 기쁨이 별 것 아닌 풍경을 동화처럼 만들어놨는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회전목마라는 곡이 끝도 없이 재생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맛집 찾을 힘도 없어서 DDP 푸드코트에서 수제버거로 대충 허기만 면했다. 전국에 있는 수제버거 맛집을 아무리 돌아봐도 거제의 덕둔버거 만한 데를 못 봤고 전국의 텐동집을 순례하듯 돌아도 니지텐만한 곳이 없다. 
 

 
 
전시입장료에 비해 내실은 별로였던 전시. 호크니의 명성에 기대고 있지만 분명히 호크니전이 아니고 브리티쉬팝아트전이다. 형형색색의 전시장은 예쁘긴했지만 추천할만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DDP 무료 전시를 관람하다가 갖고 싶어졌던 소니 TV. 여기다 패니콤 연결해서 슈퍼마리오 하고 싶더라. 이 시절의 소니는 정말 대단했던 것 같다. 지금껏 월드브랜드로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레전드지만. 
 

 
스태미너가 바닥난 상태에서 마음의 고향 인사동으로 와서 호텔 체크인하고(열악한 서울의 주차 환경이 나를 또 경악하게 했다.) 바로 저녁 먹으러 익선동 고깃집에 갔다. 작년 5월에 왔을 때 리모델링 중이라 못 먹었으니 일 년 넘게 못 먹었던. 외국인 직원이 주문을 받는 게 아무래도 어색했지만(이 직원 분이 카드결제를 두 번 해서 결국 취소하러 다시 들렀음.) 고기 맛은 여전히 좋았다. 폭우 속에서도 익선동 고기 골목은 왁자지껄했다. 서울 사람들 다 뛰어나온 듯.
 

 
원래는 프릳츠 본점에 가보려고 했는데 비 때문에 숙소 근처의 원서점으로 만족. 예전에 가봤던 합이라는 병과점 1층, 아라리오 갤러리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옥을 개조해서 만든 공간은 이제 너무 많이 봐서 별다른 감흥은 없을 만도 한데 빗속에서 바라보니 감성이 막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맑은 여름날 이곳 야외에 앉아 스페셜티 커피 아이스로 한잔 마시고 있으면 세상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리오슈 토스트. 이곳 빵이 맛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진짜 괜찮았다. 토스트와 파운드케이크 중간쯤의 맛과 식감이 느껴져 좋았다. 함께 시킨 브루잉커피는 코스타리카 에르바수 산로케 세미 워시드, 오렌지, 포도, 천도복숭아, 그리고 초콜릿의 긴 여운이라는 테이스팅 노트답게 마시자마자 과일 향미가 강하게 다가왔다.  물개 청자 종이컵이 너무 귀여워서 그대로 갖고 오고 싶었다. 배지 세 개, 커핑컵 한 개, 원서점 전용 블렌드 원두 200g에 커피 두잔, 빵 한개 시켰더니 저녁으로 먹은 고기 값보다 더 나왔....
 

 
부산은 하도 많이 가서 옆 동네 같은 느낌이 있는데 서울은 많이 와봐야 일 년에 3-4번 정도니 물리적 거리 뿐만 아니라 심리적 거리도 너무 멀었다. 그런데 끝도 없이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처마 끝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보며 여유를 부리고 있으니 잠시지만 마치 동네 커피숖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맘에 드는 커피는 한잔했으니 술을 해결해야 할 것 같아 떠돌다 낙원상가 근처에서 발견한 쿠시카츠 전문점 라쿠엔. 분위기가 너무 괜찮아서 기웃거리다 메뉴를 보니 비주얼에 비해 합리적인 가격이라 자리 잡고 앉아 버렸다. 점심 때는 카츠류의 식사 위주인 듯하고 저녁에는 술집으로 운영되는데 일식 사시미 종류부터 야끼토리, 쿠시카츠, 파스타 등의 서양 요리까지 다양한 메뉴를 제공하고 있었다. 
 

 
사케와 와인에 비해 맥주는 몇 종류 없어서 아쉬웠다. 압구정 오렌지라는 이 맥주는 과일향 가득한 에일 계열이라 느끼한 메뉴와 페어링이 참 좋았다. 
 

 
 
저녁으로 고기를 야무지게 먹었던 터라 야끼토리 단품 몇 개를 시켜 가볍게(?) 먹었다. 하나 같이 흠잡을 곳 없이 좋았다. 
 

 
잘 뭉쳐졌지만 베어 무니 부드럽게 풀어졌던 츠쿠네도 만족스러웠고, 
 

 
닭날개 교자도 맛있게 한입에 싹.  
 
다음에는 이곳에서 저녁을 먹어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괜찮은 집이었다. 배가 부르지 않았다면 지갑을 걱정해야 했을 지도. 라쿠엔에서 나왔을 때도 초저녁이었지만 그치지 않는 비 때문에 신발이 축축하게 젖어버려 더 돌아다니지 못하고 숙소로 복귀했다.  
 

 
 
다음날 아침에도 비는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아침 내내 숙소 대청마루에 앉아서 젤다의 전설 사당 투어. 날씨 때문에 어딜 갈 수가 없어 결국 여의도 더현대 서울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체크 아웃을 했다. 
 

 
더현대 지하의 식당들은 웨이팅 때문에 먹기 힘든 편인데 오픈런을 했더니 의외로 여유롭게 입장 가능. 긴자바이린이라는 돈가츠 전문점에서 특로스카츠와 히레카츠를 먹었다. 밑젖음도 튀김옷 박리도 없이 부드럽고 담백하고 바삭했던 한 접시. 근데 특로스보다 일반 로스가 더 맛있었던 게 좀 에러. 
 

 
 
밥 먹었으니 커피를 마셔줘야지. 카멜커피에 가볼까도 했지만 이미 웨이팅이 심해서 블루보틀로 타협. 커피맛 전혀 모르고 마실 때는 몰랐는데 이곳 커피도 일반 아메리카노는 그냥 그랬다. 원두를 싱글오리진으로 바꾸니 수준이 달라지긴 했지만 푸어오버(드립) 커피 가격이 6500원인데 싱글오리진 아메리카노는 6800원이니 이곳에선 그냥 푸어오버로 마시는 게 답인 듯. 화사한 과일차 같은 산미를 품은 케냐 푸어오버는 좋았다. 
 

 
백화점에 있던 피아노에 앉아 히사이시 조가 작곡한 키쿠지로의 여름 주제곡을 치고 있는 진진이. 아직 어설프긴 했지만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앉아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게 대견스러웠다. 그 막막했던 시절을 어찌어찌 버텨내고 이만큼이나 키워놓은 게 참 신기하다. 
 

 
더현대에서 제일 놀랐던 건 시계 전문 수리점이 있었다는 것.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이곳에서 장사가 될 만큼의 수요가 있다는 게 정말 신기했다. 
 
 
더현대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폭우 속을 달려 통영에 도착하니 저녁 8시. 안 그래도 먼 길인데 빗길 운전이라 더 힘들었다. 결국 씻자마자 바로 기절. 아침에 일어나서 대체 공휴일의 존재에 깊은 감사를 드렸다. 비 오는 날 서울행은 사람 할 짓이 아니라는 교훈을 가슴에 새기며 연휴를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