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수강했던 전공필수 과목 중 사회과 교사가 되어 활용해야 할 교보재 활용을 실습하는 수업이 있었다. 학기가 마쳐갈 때쯤 교수님께서 내주셨던 과제가 수업에 활용할 사진을 주제에 맞춰 찍어 하나의 스토리로 구성 해오라는 것이었는데 집에 있던 삼성 자동카메라로는 뭔가 좀 아쉬워 만화 그리던 친한 형에게 문의를 했더니 안 쓰는 필름 카메라가 있다고 술 한잔 사주고 갖고 가라고 했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 형과 소주를 진탕 마시고 난 다음 날 비닐백에 담아서 왔던 게 바로 이 위스타 45였다. 35mm 똑딱이 카메라 밖에 써보지 않았던 내가 대형 필드 카메라를 다룰 수 있을 리는 만무했기에 이걸로 과제를 하지는 않았고(형은 카메라 본체만 줬을 뿐 필름 홀더도 필름도 주지 않았다.), 사극에서나 봤던 것 같은 이상한 고물을 줬다면서 집 한구석에 처박아 놨던 게 90년대 말의 일이었다. 전역 이후에는 본격적인 디지털카메라의 시대가 열렸기에 이 녀석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다가 교사가 된 후 사진을 본격적으로 찍으면서 대판 사진이 궁금해 자료를 찾아가면서 공부했고 작업에 필요한 몇몇 사진을 촬영하기도 했다(담임 맡았던 애들 단체사진을 찍는 용도로 많이 사용했는데 그때 찍어놓은 사진들이 지금 봐도 참 좋다.). 하지만 대판을 계속 사용할만한 끈기 따위는 내게 없었고 디지털의 편리함에 익숙해진 뒤에는 필름을 사용해도 중형 이상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맞이 집 청소를 하다가 옷방 한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녀석을 보니 옛 생각이 나서 클리닝하고 필름을 끼운 후 한컷 찍었다. 그리고 접어서 있던 자리에 다시 놓았다. 내가 이 카메라를 들고 의미 있는 작업을 하게 될 일은 없겠지. 방금 찍은 사진도 대단한 것은 아니니 현상을 할 일이 없을 거다. 그냥 순간의 감정에 충실한 유희에 불과했을 뿐. 정착되지 않은 상이나 정착되고도 현상되지 못한 상, 그리고 현상되었더라도 의미를 찾지 못한 상.... 모두 기억되지 않고 잊혀 간다. 이 카메라에 얽힌 기억은 내 머리 속에 정착되어 때때로 소환되긴 하겠지만 그것도 큰 의미 없는 블로그나 SNS의 글감에 불과하겠지. 뭔가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도 적절한 장소와 때, 의미를 맞이하지 못한 모든 것은 이토록 슬프게 소모되고 만다. 디어도르프나 린호프 처럼 시간이 지나도 값이 떨어지지 않는 명품이 아닌 그냥 싸구려 보급품에 불과해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기도 애매한 보급형 대판 카메라 위스타 45. 우연히 내 손에 들어와 더욱 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 이 카메라를 보며 이렇게 감정 이입을 하고 있는 것은 내 삶의 모습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