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처럼 지난해와 새해의 경계가 모호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24년 마지막 날 반 애들에게 한 해 수고했다는 종례를 하고 나오며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을 정도. 이러고 또 새해 첫 조례 때는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얘기를 하고 있겠지. 이게 다 굥의 내란 덕분. 잃어버린 우리의 한달을 돌려놔라. 그나저나 올해는 을사년.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 1963년에는 굴욕적인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졌다. 우리에겐 정말 을씨년스러운 해가 아닐 수 없다. 지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할 것 같다.
새해에 처음으로 한 일은 북신동 성당에서 미사보기. 평소 다니고 있는 태평동성당에는 새해 첫날 새벽 미사가 없어서. 북신동 성당의 십자가상은 조명이 참 의미심장하다. 좌우측으로 만들어지는 그림자가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듯. 내가 성당 관계자라면 조명 각도를 조금 더 정밀하게 조정해서 그림자를 완벽하게 대칭으로 만들어 놓을텐데.
새해에 만난 첫 고양이는 아람이. 따뜻한데 앉아서 식빵을 굽고 있었다. 겨울이라서 털이 많이 쪘다. 봄이가 사라져서 103동에 사는 고양이는 이제 만두와 아람이 뿐. 봄이 되면 또 새로운 녀석이 나타날지도 모르지만 왠지 마음이 쓸쓸해진다. 내가 사랑했던 길냥이들은 왜 그리 단명하는걸까.
새해 첫 식사는 와이프 떡국. 한살 더 먹는게 부담스럽긴 하지만 새해 떡국은 못참지. 갑자기 남한산성 떡국 장면이 생각나서 개다리 소반에 놓고 한장 찍었다. 소고기가 듬뿍 들어간 떡국 한그릇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을 수 있다는 것만해도 행복한 삶이다. 범사에 감사하자.
새해 첫 커피는 목요일 오후 네시에서 사왔던 콜롬비아 라에스페란자 부에노스아이레스 게이샤 워시드. 두말할 필요없이 최고. 약배전 원두임에도 어떻게 이리 바디감을 잘 살렸는지. 새삼스레 로스터의 역량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도 주력 커피는 목네로 쭉 가는걸로.
새해 첫 위스키는 지난해 다원 배원장님께서 주셨던 맥캘란 이니그마. 마지막 남은 한잔은 나에게 주고 싶었다는 배원장님의 마음이 고마워서 아껴놨었다. 진한 호박색(위스키 메이커의 노트에는 스페인 일몰색이라고)이 눈으로만 봐도 맛있어보였는데 스윗한 배원장님의 마음만큼이나 달달하면서도 의외의 스파이시함이 있는 한잔이었다.
2025년에도 결국 알라딘 다이어리. 책사면 주니까 어쩔 수 없이 계속 쓰고 있는데 만년필을 쓰면 뒷비침과 번짐이 심해서 볼펜용으로 쓰고 있다. 만년필용 다이어리를 사고 싶은데 돈이 없다. 올해는 또 어떤 일들로 365칸을 가득 채우게 될지. 좋은 일만 좋은 일만, 제발 좋은 일만.
일년에 한번 돌아오는 맥도날드 행운버거. 아들 말로는 연초에 행운 버거 먹는건 이제 세시풍속 중 하나라고. 어쨌든 행운이 들어차길 기원하며.
티없이 맑은 하늘,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거실에서 멍때리다 하루를 마감한다. 이토록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해서 이어지기 바란다. 내게도, 우리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