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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by day

구구단과 아버지

by coinlover 2020. 2. 28.

 

다음 주부터 2학년이라 구구단 외우기에 정신없는 진진이.

4단을 외우다 막혀서 엄마한테 잔소리 듣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아버지가 생각났다.

돌아가시기 전날 토요일, 노을이 묘하게 물들고 있던 그 저녁.

아버지는 내게 구구단 7단을 제대로 외우면 월드콘을 사주겠다고 하셨다.

자신감 있게 도전했던 나는 잘나가다가 칠팔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좌절해버렸고

너무 먹고 싶었던 월드콘 득템의 기회는 그렇게 날아갔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소파에 앉아계신 아버지 옆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주의를 끌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사주지는 않으셨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버지가 그렇게 살가운 성격은 아니셨다.)

그때는 괜히 심술이 나서 아빠를 미워했는데,

지는 해를 보며 지금의 진진이처럼 짜증을 내고 그랬는데....

다음날 그렇게 돌아가실줄은 나도 몰랐고 아버지도 전혀 모르셨을 것이다.

아마 그럴 줄 아셨다면 월드콘 따윈 먹고 싶은 만큼 사주셨겠지.

어린 시절 겪었던 수많은 일들이 대부분 잊혔으나  

냄새까지 떠오를 정도로 기억 속에 디테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몇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선명한게 이 순간이다.

그후 3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어느새 내 아들이 구구단을 외우고 있다.

세월이 무색하게도 나의 정신연령은 크게 늘지 않았는데 나이는 이렇게 먹었구나하는 생각을 하다  

혹시라도 진진이를 두고 아버지처럼 떠나게 될까봐 두려워졌다.

아버지도 하늘에서 손자의 이런 모습을 보며 그 순간의 회한을 떠올리고 계시려나.  

아버지께서 살아계셨더라면, 진진이를 만나셨더라면

구구단 4단을 외우다 실수를 했더라도 월드콘을 사주셨을까? 아니면 나한테 하셨던 것처럼 사주지 않으셨을까?

진진이의 구구단 외우는 소리를 들으며 의미없는 상념 속으로 빠져들어

그 속에 살아계신 아버지의 모습을 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