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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많은 만화를 보고도, 그토록 많은 만화를 수집하고도,

 

그토록 오랜시간 만화를 그려오고도

 

여태까지 만화에 대한 글을 쓴적이 없었다는걸 깨달았다.

 

나의 글이나 지적 수준이 저 위대한 책들을 논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을 알고 있지만

 

그나마 만화만큼은 누구보다도 오래, 진지한 마음으로 탐독해왔기에

 

실없는 글을 끄적여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한게 세상의 모든 만화라는 리뷰였다.

 

내 블로그를 들려주시는 손님들께 딸랑 사진이나 몇장 구경시켜드리는게

 

예의가 아닌듯 하여 조금은 긴 글을 써보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모든이란 내가 구축한 작은 것을 지칭한다.  

 

나는 이 땅위에 존재하는 사람만큼의 세상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으며

 

서로 다른 그 세상들을 조금씩 보여주며 교류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나누고 싶다.

 

이 시도가 얼마나 오래, 정기적으로 이뤄질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절대로 내가 구입하고 읽은 만화들만을 소재로 한다는 대원칙 아래

 

무리하지 않고 볼 생각이다.

 

 

세상의 모든 만화 #1 차도 채여도 청춘의 여름은 몇번이고 온다 - Rough 러프

 

 

델리스파이스의 고백, 응답하라 1994의 공통점은?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델리스파이스의 고백은 H2의 주인공 히로가 하는 독백을 그대로 차용해왔으며

 

응답하라 1994의 경우도 에피소드와 연출 중 많은 부분을 활용했다.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이 (비록 불법이었지만) 유통되기 시작했던 것이 1990년대 초반임을 고려하면

 

그 시절을 살아갔던 사람들이 사회의 주력이 되어가는 지금 그의 작품에 영향받은

 

컨텐츠들이 등장하는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1992년,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맞이하는 날이었다.

 

형이 검은 가방에 500원짜리 만화책을 한가득 가지고 집에 돌아온 것이.

 

당시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드래곤볼은 아이큐점프에서 연재하는 속도보다

 

500원짜리 해적판 만화로 나오는게 더 빨랐고 초등학교 문구점 앞은 불법만화의 천국이었다.

 

드라곤의 신비 등의 이름으로 유통되던 500원짜리 만화책으로

 

당시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일본의 명작만화들을 접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파울볼이란 이름으로 읽었던 시티헌터, 철인전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가이버 등....

 

근데 그날 저녁 형이 가져은 500원짜리 만화책들은 기존에 보던 것들과는 좀 달랐다.

 

순정만화인듯 설렁설렁 그린 느낌에다가 당시 유행하던 배틀물이 아닌 야구를 소재로한 스포츠물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후 내 감성의 한축을 차지하게된 TOUCH와의 만남이었다.

 

드래곤볼을 배껴가며 만화가의 꿈을 꾸던 나에게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는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런 소재로도 만화를 그릴 수가 있구나. 이렇게 심심한듯 재밌는 스토리를 쓸수 있는거구나.

 

아다치의 세계에 빠져든 이 망가 키드는 한동안 TOUCH와 유사한 야구만화를 그리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후 H2, 크로스로드 등 그의 만화를 있는대로 탐독하며 빠져들어갔지만

 

나에게 최고로 남아 있는 아다치의 만화는 청춘의 여름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만화 Rough였다.

 

 

 

 

Rough 거친, 미완성의

 

 

 

 

 

 

만화 본편에 등장하는 수업 장면에서 작가는 이 만화가 미완성의 청춘에 대한 이야기를 할거라고 밝히고 있다.

 

주인공인 야마토 케이스케와 나노미야 아미는

 

전통과자점을 운영하는 집안의 후손들로

 

할아버지대부터 대물림되는 악연으로 얽힌 사이다.

 

이들이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잔잔히 그려가며 서로에게 끌리는 청춘의 이야기를 무리없이 진행해 나간다.

 

이 만화를 보며 너무 놀랐던 것은 당시로서는 만화화 된 적이 전무했던

 

수영이라는 소재로 엄청난 재미를 끌어냈다는 것이다.

 

지금도 수영을 소재로 이만한 완성도를 보이는 만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수영이라는게 아무리 잘 그려내도 정지된 영상으로 표현해내는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만화는 정적인 연출을 최대한 활용해 그안에서 가장 동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아다치의 작품에서 자기 재생산을 거듭하고 있는 클리셰들은 이 만화에서도 유효하다.

 

-약간은 어수룩한 더벅머리의 남자 주인공. 무심한듯하나 성격은 따듯하고 세심한 배려심을 가진다. 잠재력이 대단하다.

 

-단발머리의 여자주인공은 공부와 스포츠 등 모든 분야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이며 알게 모르게 주인공을 잘 챙긴다.

 

-소재가 되는 스포츠의 천재인 남자주인공의 라이벌. 외모와 성격까지 완벽하나 너무 완벽해서 매력이 반감되고 결국 망한다.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은 서로에게 끌림을 알고 있으나 그 마음을 직접적으로 내 보이지는 않는다.

 

-남주의 라이벌과 여자주인공은 잘될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나 결국 이뤄지지 않는다.

 

Rough는 여기에 로미오와 줄리엣 코드를 깔아 전작들과 유사한듯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어떤 사람들은 아다치의 작품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나는 오히려 그의 그런 면을 좋아한다.

 

분명 어떻게 진행될지 예상이 되는데 그 진행을 보는 것이 너무 즐겁고 흥미진진하다.

 

그것이 바로 연출의 힘이다. 일본에서 만화의 거장이라 추앙받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만화는 전체 12권(대원씨아이에서 발행된 정식 발매본 기준, 애장판이 아닌 일반판)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데 그게 무엇보다 좋았다.

 

나는 아무리 재밌어도 몇십권씩 이어지는 만화는 절대 챙겨보지 않는다.

 

(드래곤볼은 예외. 나루토나 원피스 등의 만화는 중간 중간 끊어볼뿐 절대로 소장할 생각이 없다.)

 

아다치의 작품들 중에서도 짧은 편인 이 만화는 완벽한 플롯을 따라 이야기가 달려가며

 

군더더기가 전혀없는 진행과 결말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가치를 극대화 해주는 것이 바로 결말이다.

 

대작 만화들이 결말을 용두사미로 처리하여 실망감을 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Rough의 결말은 화룡점정이라고 해도 될만큼 완벽하다.

 

열린 결말인듯 열린 결말이 아닌, 한동안 작품의 여운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아련함을 선물해준다.

 

(치인트 드라마 작가님이 좀 배워야 할 듯. 그 결말은 열린 결말이 아니라 뚜껑 열린 결말이라고 하더라구요.)

 

고등학교 생활 동안 겪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그려나가기에 작품 내에는 다양한 계절이 등장하지만

 

나는 이 작품을 읽는동안 계속되는 여름을 느꼈다.

 

분명 만화는 정적인 연출을 활용하는데 그렇게 탄생한 만화에서는 여름과 같은 열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기분 나쁜 찝찝함이 아니라 바람을 가르며 달릴때 느껴지는 신선한 땀내음과 같은 상쾌한 것이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만이 내뱉을만한 오글거리는 대사들이,

 

때로는 시같은, 때로는 수필같은 말풍선 속의 그 글들이

 

차도 채여도 몇번이나 다시 오는 청춘의 여름을 칸칸이 채워넣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렁설렁 그린듯한 인물과는 달리 세심하기 이를데 없는 배경이 그 여름의 분위기를 뒷받침 해준다.

 

스크린톤을 긁어낸 것이든 먹으로 그린 것이든 그가 그려내는 뭉게구름은

 

이보다 더 여름을 잘 형상화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여름날의 뭉게구름을 보면 아다치 미츠루 구름이라고 부르곤 한다.

 

이 만화를 읽던 나이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청춘이, 그 아련함이

 

리뷰를 위해 만화책을 앞에 둔 지금 다시 밀려오는 것 같다.

 

이미 청춘이라는 시기를 거의 보내고 중장년으로 달려가고 있는 지금에 와서

 

다시 읽는 Rough에는 지난날의 추억까지 같이 담겨 예전보다 더욱더 내 마음을 울렁이게 하는 것 같다.

 

아직 Rough를 읽지 않은 독자들이여, 인생의 재미가 꽤 많이 남아있는 그대들의 눈과 뇌가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