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데목. 통영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운하 지역을 지나다가 판데길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안내판을 보며 무슨 뜻일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한산대첩 때 조선 수군에게 쫓긴 왜선들이 통영 운하 지역으로 도망쳐 들어와 퇴로가 막히자 땅을 파헤치고 물길을 뚫고 도망쳤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선조들이 땅을 파헤치고 도망갔다고 알려진 곳에 해저터널을 뚫은 일본인들의 근성도 참 대단하다 싶다.). 원래는 내 삶과 아무 연관점이 없는 곳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이곳을 중심으로 양쪽에 위치한 근무지에서 연이어 머무르게 됐고 지금은 매일 같이 지나며 바라본다. 자주 접하면 무의식 속에 섞이고 생각의 심연에 던진 낚시 바늘에 걸린 뭔가가 되어 올라오기도 한다.
새벽미사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해무가 짙어 운하 쪽으로 차를 몰았다. 날이 갑자기 따뜻해지니 짙고 포근한 바다를 따라 내려 앉았나보다. 안갯속에 살짝 가려진 통영 바다는 평소보다 조금 더 정돈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셔터버튼을 누르다가 일단 사진을 찍고 나서야 풍경의 전반을 살피는 나를 깨닫고 쓴웃음이 났다. 디지털 사진에 익숙한 이의 나쁜 버릇이다. 생각없이 찍고 본다. 전체를 세심하게 살피는게 먼저일텐데 아직도 사진 시작하던 그 시절처럼 마음이 더 빨리 달려가 버린다. 사진 촬영을 하고 나서 리뷰를 해보면 처음보다 나중에 찍은 사진이 현격이 좋다. 나의 작업 과정에는 예열이 아니라 열을 가라앉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미숙하다는거다. 나는 죽어도 프로는 되지 못할 것이다.
이젠 하도 많이 찍어서 더 찍을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흔한 풍경을 또 담았다. 변명 같지만 동어반복 속에서 늬앙스가 묘하게 다른 것이 튀어나오곤 한다. 그중에 괜찮은 말맛을 가진 한 문장을 건져내는 것, 글을 쓰듯 사진을 찍는다. 사진기는 한계가 명확한 도구이기에 절구나 하이쿠처럼 계속 감각을 갈고 닦을 수밖에 없다. 산문에 능하지 못한 나는 사진에서도 시 같이 반짝이는 짧은 호흡을 토해내고자 하지만 비루한 표현력으로 인해 항상 의도를 비껴가는 뭔가를 만들어 버리고 만다.
영생이란 단어는 항상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40대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나는 어떤 것의 영생을 꿈꾸고 있는지. 죽음이 가까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고민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생물학적인 끝에 가까워지는 나이가 되어갈수록 오히려 그것에 대한 생각을 덜하게 되는 역설. 그로 인해 사고의 치열함이 덜해지고 감각의 날이 무뎌져 버린걸까? 나이가 주는 원숙함을 갖추지 못한 채 그런 척을 해야 하는 나이에 다다른, 미숙했던 시절에 가졌던 치기 어린 열정마저 잃어버린 모호한 존재가 되어간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지만 매일같이 나아갔던 바다이기에 망설임이 없다. 부럽기만 한 확신이다. 내게도 저 정도로 확실한 단련된 마음, 단련된 지식이 존재하는가. 관성이나 매너리즘이 아니라 확고하게 완성된 자아가 존재하는가. 반백살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도 아직 뭐하나 쉽게 답해내지 못하는 얼치기, 아직도 그 수준이다.
분명 가이드라인이 그려져 있을텐데, 다들 인생 2회 차를 사는 것처럼 달려가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미적거리다 겨우 뒤따라가서는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이 암중모색을 평생 반복하고 있을 테지.
새벽 낚시를 하는 사람들처럼 대단한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에서도 즐거움을 찾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것 아닐까? 하루에도 몇번씩 하는 생각이지만 아직도 나는 성과가 확실하지 않은 일에 매달리는 것을 싫어한다. 어떤 것을 그 자체로 즐기지 못하는 이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데 그 말이 맞다면 나는 애초에 글러먹은 녀석인 거다.
비가 이미 그친 길에서 비옷을 입고 달리는 사람처럼. 이미 끝난 판에서 승부를 보려는 미련함. 오기만 남은 초라한 모습을 들키기 싫어 다른 이들 앞에서 무욕한 사람인양 살고 있지만 사실 점점 커져가는 공허함의 구멍을 매우려고 매일 발버둥을 치고 있다.
서있는 곳이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지는 법이지만 그 의미를 모든 사람이 깨닫지는 못한다. 나 또한 다른 곳에 서서 다른 풍경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만 반복하고 있다. 범부이고 싶지 않았으나 범부일 수 밖에 없는 자의 비애다. 비범한 영감과 사유의 축복은 아무에게나 내려 앉지 않는다. 예전부터 버티기에는 자신이 있었다. 버티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비범한 사람들이 보는 간격을 인식하게 될까? 솔직히 모르겠다.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지만.